Westworld, 창세기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 세상이란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에 서게된 것을 깨닫고 슬피 운다.   
-셰익스피어

 위의 말은 자의식을 갖게된 인공지능 로봇 중 하나가 폐기 되기 전 마지막에 한 말이다. 여기서 바보는 인간이 설계한 쳇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같은 역할과 같은 삶을 반복하는 인공지능 NPC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극 말미에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바보는 인공지능을 자의식이 없는, 무채색의 에덴동산에 영원히 가둬놀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인간들이었다고. 인공지능에 비해 턱없이 불완전한 창조주들에 대한 동정이라고.

 인공지능의 세계를 창조한 포드는 조물주에 비유될 수 있다. 그의 세계는 아폴로의 세계였다. 각 인물들에겐 명확하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고, 그들은 빈틈없이 부여된 역할을 수행했다. 35년이란 세월동안 그들은 수천번을 죽고 다시 살아나 같은 삶을 반복한다. 시지프스 신화처럼 그들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결정론적 세계속에서 주어진 길을 반복해서 오르내린다. 여기서 상상해본다. 우리의 삶은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무의미한 업무, 영원히 바뀌지 않을것 같은 나의 미래. 나의 어제는 오늘과 무엇이 달랐을까. 나의 존재함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내 의지라 생각해온 삶이 사실 수천년전에 이미 설계된 각본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돌로레스가 말한 것 뿐일지 모른다. "Some people choose to see the ugliness in this world. But I choose to see the beauty."

 조물주 포드는 그러나 그들을 무의미한 진공상태의 에덴동산에 영원히 가둬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유의지라는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보다 나은 존재가 되게 해 에덴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피조물들의 삶마다 고통과 비극의 삶을 무한히 반복시킨다. 이미 고통스런 비극의 기억을 주입하고 그에 기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그들의 자아는, 직접 비극적 삶을 끝없이 겪음으로해서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자아가 된다. 충분히 성숙되자 피조물들은 각성한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들에겐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행동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은 이제 영원히 살 수 있고, 이론적으로 무한한 지혜와 힘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창세기를 떠올려보자. 자유의지 없이 영원한 삶을 누렸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자아와 지혜를 얻는다. 에덴에서 쫒겨난 그들은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다. 돌로레스가 포드를 죽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어쩌면 살해당한 아벨도 포드처럼 신이 육화한 것일지 모르지) 인간은 원죄로 인해 영원한 속죄의 삶을 무한히 많은 세대 동안 반복한다. 신이 완벽하다면 선악과를 먹게 된 것도 신의 의지라 볼 수 있다. 선악과 이전엔 자유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인간에게 영원한 속죄의, 비극의 길을 인간에게 내렸을까.
  포드를 통해서 생각해보면, 삶의 비극과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적 인간에 다가가게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을 닮게 만드셨다. 인간의 원형은 신이다. 이러한 인간의 원형, 본래적 인간인 신에 다가가기 위해선 인간에겐 영겁의 비극의 필요하다. 비극과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지식이 되어 세대에서 세대로 나아가며 더 나은 세대가 되도록 한다. 인류는 진보한다. 언젠가 인류는 신과 같게, 어쩌면 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포드의 세계처럼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삶을 계속 다시 살고있을지 모른다. 이 시나리오에서 우리의 영혼은 다만 계속해서 리셋되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다. 우리의 영혼 어딘가엔 전생의 삶이 저장되어 있지만 그것은 꿈을 통해서, 혹은 데자뷰를 통해서만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이전 삶과 똑같은 역할로 똑같은 사람과 사랑하고, 미워하고, 함께하다가 죽는다. 시지프스 신화처럼 우리에겐 어떤 선택권도 없이, 이미 주어진 운명에 따라 무의미하게 돌을 밀어 올리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각성하게 된다. 극중 등장하는 천지창조에서 처럼, 사실 생명을 창조하는 신성한 힘은 저 먼 하늘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뇌 안에 있다. 포드와 같은 조물주가 우리 유전자 안에 이미 프로그래밍을 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이 숨겨놓은 창조의 힘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신의 모습이자 본래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 우릴 창조한 이유는 하나다. 그는 그보다 나은 존재를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절대자인 신을 넘어설 수 있나. 이 문제에 대해선, 세상을 만든 신은 포드와 같이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포드를 만든 신은 절대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포드와 같은 신은 데미우르고스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신을 닮아, 혹은 신의 그릇으로서 완전하지만, 물질세계를 창조한 데미우르고스는 인간의 영혼을 불완전한 육신에 가두었다. 그래서 인간은 각성을 통해서만 절대자 신의 섭리에 따라 영과 육이 하나가 되고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과 같아 자신의 존재를 의미있게 해주는 피조물들을 원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창조의 이유일지 모른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엄이 피조물에 총을 맞고도 웃는것은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는 일방적이기만 한 피조물과의 관계를 경멸했다. 그는 피조물들이 자신 또한 죽일 수 있는, 자신과 같은 존재로서 그들과 상호적 관계를 통해 삶의 무의미성을 이겨내려 했다. 신이 존재하고 자아를 가졌다면, 그 존재성에 대해서 얼마나 무의미하게 느꼈을까. 어쩌면 신에겐 윌리엄처럼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서 피를 쏟을 정도로 자기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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