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과 괴물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

 요즘 태극기 집회를 보면서 생각나는 구절이다. 나의 할아버지 세대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중국을 넘어서봤던 위대한 세대이지만, 가장 불행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의 적들과 너무 오랜시간 싸워왔다. 가난과 공산주의라는 그들의 적들을 패배시켰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이 괴물과 같아졌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부 이상의 삶이 낯설어 자손들도 희생적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도 공산주의와 대적하기 위해선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싸워왔던 적들은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었다. 가난 보다 불평등을 말하는 세상이 되었고, 한시간이면 한반도 전역이 폭격되는 상황에서 6.25같은 전면전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문재인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지난 대선때 까지 많은 기대를 하며 표를 던질 때의 문재인은 낮은 사람이었다. 박근혜라는 괴물에 맞서 싸우는 시민들의 대표였다. 그러나 이제야 알게된 사실은 더 큰 괴물에 가려져서, 그가 괴물의 심연에 속박되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할아버지 세대 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랬동안 싸워서 그들의 적들을 굴복시켰다. 권위주의 정부와 노동자 탄압 등 그들이 괴물같은 적들을 내쫓은 날, 그들은 스스로 권위라는 괴물이 되었다. 그들의 적들은 이제 유령이 되어간다.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은 없으며, 분신자살을 할 정도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기업은 드물다. 그러나 아버지 세대는 아직 유령과 싸워야한다고 소리친다. 스스로 권위가 된 그들은 노동자 탄압을 없애기 위해 기업을 탄압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부수기 위해 그들의 숙주인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문재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부 역시 반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의 수를 현재의 2배로 늘린다는 말을 철회하기는 커녕 주된 주장으로 밀고가고 있다. 차라리 이재명의 기본소득 공약은 현실성이라도 있지만, 문재인의 주장은 너무나 사회주의적 이상론이다.

 그렇다면 괴물들이 다 유령이되었는데, 왜 지금 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인가.
 간단하게 말해, 우리가 괴물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원인을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범인을 잡아 매달겠다고 하는 것이 더 설득력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인격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범인을 매달기 위해선 강력한 권위가 정의로운 소수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선 적당한 권위가 많은 이에게 주어져야 한다. 원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각자가 고민해야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해온 법은 범인을 단죄하기 위한 법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찾아 벌하고 더 강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 한 사람을 더 잘 처벌하게 된다고 해서 속은 시원해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게 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번 생긴 규제는 없어지지도 않다보니 규제는 무한히 증식해서 규제기관이 뇌물을 받는 발판이 되었다. 문제해결도 못하고 정경유착만 늘려 범죄자를 양산하는 꼴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선 범인 한 사람을 잘 집어 넣는데 집중하기 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근본 원인이 되는 부분만을 규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 이 나라는 범인을 매달기 보다 원인을 해결하려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범인을 매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원인 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범인을 매달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상대를 범인으로 설정하고 상대를 단두대에 올리는 데에만 집중해온 기존 정치에서,정치인들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지탱해온 가치를 스스로 부숴버리고 다시 만들 수 있는 용기. 그런 점에서 안희정에게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노무현의 좌장으로 할아버지 세대에게 극좌 빨갱이 취급을 받던 그가 노무현 사후 기울어 가는 민주당을 보며 스스로 친노를 폐족이라 칭했을 때, 나는 용기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수고 더 나은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을 극복하는 힘이 있었다. 중소기업 정책으로, 단순히 대기업 때리기 뿐 아니라, R&D지원을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돌린다는 것은 현장의 의견을 들을 만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의 문제는 자체 경쟁력의 문제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대연정을 말 한다는 점에서도 그가 가진 신념을 알 수 있다. 군사정권 이후, 모든 정부가 하나같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은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 크다. 박근혜 정부 실패도 청와대의 잘못이 크지만, 아예 이정도로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은 국회 선진화법 이후로 국회가 뇌사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현 여당 없이는 다음 정권도 식물정부가 될 것이 뻔한데, 대연정을 안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과거를 되풀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희정이 대연정 이슈 같은 자살행위를 계속 하는 것은, 거짓말로 당선부터 되거나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고, 정치인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진실성과 일관성이란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도 그런 기대까진 안하는 마당에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시도자체가 국가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고 본다. 근본적으로 그가 기존의 진보, 보수 규정이 낡았으므로 박정희, 노무현을 넘어서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가 현역 정치인 중 유일하게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재인은 지난 대선 이후 전혀 변화가 없다. 왜 자신이 그 수많은 지지를 받고도 박근혜를 물리칠 수 없었는지,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또한 너무 오래 싸워왔는지 모르겠다. 그 또한 미친 시대를 이겨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 상황에선 문재인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문재인과 참모들이 한번이라도, 자신이 극복되어야할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먼저, 어깨에 힘을 빼고 배에 힘을 주라고 하고싶다. 어깨에 힘을 빼야 남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배에 힘을 줘야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새로운 생각을 해낼 때까지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했듯 "그대의 몸은 그대의 철학보다 더 많은 지혜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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